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 붕괴 (문단 편집) === [[페레스트로이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1980년대 소련은 군비경쟁으로 인한 군비 부담, [[계획경제]]의 비효율로 인한 경기 침체, [[동유럽]]에서 증가하는 민주화 요구로 인하여 서서히 침체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982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직후 소련 공산당은 당시 정치국 원로였던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를 각각 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모두 2년과 1년 남짓한 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3명의 서기장이 연속으로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에서는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재임하면서 동시에 당시 소련이 겪고 있던 정치적, 경제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여론이 커졌다. 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정치국]] 간부들은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 시절 측근으로 일하면서 긍정적인 평판을 받았던 정치국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주목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정치국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50대)에 속했고 이 점에 주목한 정치국은 체르넨코 사후 소련을 이끌어 갈 신임 서기장으로써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선출했다. 1985년 3월 10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마주한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정치적, 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개혁하기 위해 정치, 경제적 개혁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발표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통해 당시 소련에 가해지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부담을 줄이고 장기적으로 소련을 민주적으로 개혁하여 소련 사회에 원동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당시 [[소련인]]들과 국제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냉전]]을 마무리하는 초석이 되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 사회로부터 환영받았지만 동시에 소련인들이 오랫동안 표출하지 못했던 정치적 의사를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소련인들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공산당 일당체제 개혁, 지역자치 보장, 검열 철폐 등 그동안 억압되어 왔던 정치적 의사를 요구했고 이에 소련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정치적 변화와 개혁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속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당시 [[소련 공산당]]에서는 고르바초프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급진파, 현재 개혁을 보다 온건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온건파,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로 나뉘어 점차 대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 소련은 군비경쟁으로 인한 군비 출혈,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한 복구비 소모, 중앙정부와 연방 내 공화국 간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계획경제 체제 마비, 저유가로 인한 세수 감소 등으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대폭 증가했다. 이로 인하여 소련 정부는 개혁을 이끌어 갈 경제적 원동력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소련 경제가 악화되면서 소련은 냉전 시기 동안 정치적, 군사적으로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대변되는 소련 중심 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부담을 느꼈다. 당시 소련은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시네트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동유럽 혁명]]으로 이어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하나둘씩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다. 이러한 정치적 민주화에 정점을 찍은 사건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소련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코메콘]] 등을 해체하면서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로써가 아니라 서방 국가들과 적극적 협력 및 경제적 지원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산당 내 보수파는 고르바초프의 이런 개혁조치가 기존 소련 체제를 붕괴시킨다고 판단하여 반발했고 급진파는 오히려 기존 개혁이 유약하다고 판단하여 고르바초프에게 더욱 강력한 개혁을 주문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처음에는 [[소련군]]을 동원해 [[발트 3국]] 독립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거나 [[트빌리시]], [[바쿠]] 등지에서 군을 동원해 독립 움직임을 차단하고 보수파를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군을 동원한 강경진압은 여러 공화국에서 반발이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 갈등 속에서도 고르바초프는 중앙정부와 연방 내 공화국 사이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소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1991년 소련 존속 투표]]와 [[주권국가연맹]]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련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련인들의 의사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연방 내 공화국에 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신연방체제를 약속했다. 이에 연방 내 공화국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와 함께 오랫동안 논의하면서 신연방체제 개편을 준비해나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발트 3국]]과 [[조지아]], [[아르메니아]], [[몰도바]]를 제외한 나머지 연방 국가들이 참여하는 신연방조약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합의를 마친 지도자들은 잠시 휴식을 갖고 1991년 8월 20일 신연방조약에 서명하기로 했다. 만약 서명 전날인 8월 19일 [[소련군]], [[KGB]], [[소련 공산당]] 내 주요 간부들이 [[8월 쿠데타|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Mark Kramer (2022) [[https://doi.org/10.1162/jcws_a_01059|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